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가키 마토메 (문단 편집) == 생애와 행적 == 1890년 2월 15일 [[오카야마시]]에서 태어났다. 이후 [[해군병학교]]로 진학, 1912년에 졸업했으며 당시 성적은 9등. [[일본군]]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특히 해군병학교 졸업성적이 바로 군생활 내내 출세와 진급을 좌우하는 [[일본 해군]]에서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었다. 이후 역시 엘리트 코스인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[[독일]]주재[[국방무관|무관]]으로 다녀오는 등 평범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. 이후 [[야마모토 이소로쿠]] [[제독]]의 참모진 중 한명으로 발탁되었으며, [[태평양 전쟁]]의 발발, 특히 [[진주만 공습]]을 보고 거함거포주의에서 항공전 중심으로의 해전의 양상 변화를 깨달았다…고 일본 극우들은 주장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항공전력의 해전에서의 유의미성을 인식하는 수준이었다. '그 배를 만들 자원과 자금이면 항공기 1000대를 만들 수 있다'라며 [[야마토]]의 건조를 반대하던 야마모토 제독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결국 승인을 받아낸 것도 우가키 제독이다. 어쨌든 이후 [[연합함대]]의 [[참모장]]이 되어 1942년 전역에 나섰다. [[미드웨이 해전]], [[과달카날 전투]]의 연패로 난국에 빠진 연합함대의 참모장으로서 혼란을 수습하고 참모로서 야마모토를 보좌했다. 그러나 1943년 4월 18일에 일어난 야마모토 제독 암살작전 당시 다른 G4M에 타고 동행하다가 미 육군 캑터스 항공대의 습격을 받아 격추되어 바다에 불시착했다. 우가키 제독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부상이 심했고, 사령관이 죽었는데 참모장이 살아남았다는 비난 등을 받았다. 이후 부상이 회복되면서 전선에 복귀했으나 [[필리핀]]에서 말 그대로 쳐발렸고(…) 이후 본토결사사수를 외치는 항전파의 주요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. 대본영은 그에게 미국의 본토침공이 가장 유력한 [[오키나와]]-[[규슈]] 방면의 제5[[해군 항공대|항공]][[함대]] 사령장관으로 임명했다. 이후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해 오키나와 일대의 미군에 대대적인 [[카미카제]] 공격을 단행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